크게보기 작게보기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5분만에 읽는 홍콩 현대사 (중)
1970~1980년대
2021년 07월 28일 10시 24분 입력


*홍콩의 현대사를 2회로 나누어 연재 예정이었으나 내용이 길어져 3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재정적 자주권을 확보한 식민지 정부 

1971년, 최초로 외교관 출신이 홍콩 총독에 오른다. 바로 머레이 맥리호스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동시에 각종 사회 개혁 방안을 추진한다. 67폭동은 영국 식민지 정부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에 정치적으로는 중화권 인사의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시켰고 경제적으로는 홍콩 경제 이익을 보장, 금융 감독 강화에 나섰다. 

사회적으로는 1972년 10년 주택 건설 계획 및 1974년 염정공서 설립 등을 통해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1978년에 들어서는 9년 의무 교육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내부적 개혁 및 변화 외에도 홍콩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외부적 환경 변화가 영국 본토에서 발생한다. 1968년, 식민지 본부(Colonial Office)가 외교부에 편입되면서 영국의 식민지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로 인해 홍콩 정부는1960년대 말 자율적인 재정 지출 권한을 확보한다. 영국 본토의 변화는 홍콩의 식민지 정부로 하여금 민생 개혁 방안에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에 이르러 홍콩 경제는 매년 10%의 경제 성장을 달성한다. 증권 거래 또한 줄곧 활기를 띠어 홍콩 기업들의 상장 붐이 이어진다. 고속 경제 성장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주택 건설이라는 대형 과제를 추진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1972년, 맥리호스는 10년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40%에 가까운 180만 명에게 주거지를 공급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또한 신시가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공영주택을 도심에서 떨어진 신계 지역에 건설하여 인구 분산 효과까지 얻고자 하였다. 

아쉽게도 1982년까지 이 계획안은 당초의 목표에 훨씬 못 미쳤고, 시행 기한은 1987년까지 연장되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공영주택은 150만 인구에 공급되었다. 



영국 자본가들로부터 저가로 토지를 매입, 부동산 거인이 된 홍콩 부호들

1970년대 홍콩 식민지 정부의 경제 정책은 자유 방임을 골자로 하여 시장에 대한 불간섭 입장을 취하였다. 불간섭주의는 이후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까지 줄곧 홍콩 경제를 이끌어가는 근간을 이룬다. 

1967년의 폭동 이후, 중국 공산 정권이 무력으로 홍콩을 집어 삼킬 것을 우려한 영국 자본과 부호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저가로 매각한다. 이를 사들여 부동산 거부로 올라선 기업가들이 바로 청쿵그룹의 리카싱, 선홍카이의 궉닥생, 핸더슨 그룹의 리샤오께이이다. 

사회적으로는 중국과 홍콩이 오랜 기간 분리되면서 점점 본토 의식이 싹튼다. 중국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은 원래 홍콩을 임시로 머물다 고향의 상황이 좋아지면 떠날 곳으로 인식하여 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홍콩을 중국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본토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외지에서 넘어 온 외부인들은 영구 주민증을 얻을 수 없었으나 1972년부터 홍콩에서 만 7년을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영구 주민증이 발급되어 각종 사회 복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1980년대가 되어 중산 계급이 사회 및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세력으로 부각된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다. 



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처음 등장한 ‘일국양제’, 중국 대륙으로 이전하는 제조업

홍콩의 중국 반환 기일이 다가옴에 따라 영국과 중국 두 나라는 이에 대한 논의를 해 나간다. 

1982년 1월, 덩샤오핑은 대만 문제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개념을 꺼낸다. 홍콩 사회 시스템을 설명할 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일국양제’는 실은 대만 문제를 다루는 용어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1984년 덩샤오핑이 홍콩의 상공업계 대표와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일국양제’의 이행을 홍콩 사회에까지 적용시켰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홍콩의 제조업은 대거 중국 본토로 이주한다. 개혁 개방 정책을 이끌어 갈 핵심으로 해외 화교에 눈을 돌린 중국 정부는 이들에 대한 유화 정책을 통해 각종 혜택을 약속하며 홍콩, 대만 기업들을 본토로 끌어들인다. 

이로 인해 1970년 홍콩에서 GDP 의 30.9%를 차지했던 제조업은 1989년에는 19.3%, 1996년에는 7.2%까지 떨어져 탈공업화 현상이 가속화된다. 그리고 이 빈자리를 서비스업이 대체하면서 홍콩의 경제 근간이 변화를 맞는다. 예를 들어 홍콩 영화 산업의 경우 중국의 경제 성장 및 대만 자본의 유입으로 1980년대에 황금기를 맞기도 하였다.

1989년, 중국 반환으로의 과도기 및 반환 후 중국과 홍콩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천안문 사태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홍콩의 미래에 낙담한 많은 이들이 이민을 떠난다.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약 62,000명이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당시 홍콩 인구의 1%에 해당한다. 대부분 젊고 고등 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전문 인력이었다. 그리고 홍콩 내부적으로는 민주파 인사들과 중국의 중앙 정부가 대립하게 된다. (다음주에 계속)

참고자료: 《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